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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것으로 평안을 누리는 것'은 죄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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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평안'에 대한 이해 성경은 '평안'을 누리는 것 자체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참된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한복음 14:27) 핵심은 이 평안의 근원 이 어디인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 물질적 소유, 사회적 지위, 개인적 능력 등 세상적 조건에서 평안을 찾고, 이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한다면, 이는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소유로 안도하고 만족하는 태도는 성경이 경계하는 교만이며, 영적 무감각의 표현입니다. 예컨대, 재산이 충분하다는 이유로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기도와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중단한다면, 이는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만으로 하나님 없이도 충분하다고 여긴다면, 이는 자기 의에 빠진 교만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했으나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낙심하고 평안을 잃는 것도 결국 자기 의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의존했기에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에 깊은 절망을 느끼게 됩니다. 표면적으로는 실패처럼 보이더라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보다 자신을 우선시한 신앙의 왜곡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자세는 무엇일까요? 평안이 자신에게서 비롯됐다고 믿고 그것에 의지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함으로 누리는 평안은 결코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열매이며, 그분의 은혜 안에 사는 삶의 복된 증거입니다.

“기억함”은 믿음의 출발점이며, “잊지 않음”은 순종의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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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기억하라"는 명령은 매우 빈번하게 등장하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 율법, 약속, 심판, 구원, 언약 등을 잊지 말고 늘 마음에 새기라는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 히브리어 ‘ זָכַר’(자카르) 와 헬라어 ‘μνημονεύω’(므네모네우오), ‘μιμνῄσκομαι’(밈네이스코마이) 등의 어휘는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는 차원이 아니라 지금 행동에 영향을 줄 정도로 기억하고, 마음에 간직하고, 순종하는 것 을 의미한다. 📜 성경 속 ‘기억하라’ 말씀 구절 구약과 신약에서 ‘기억하라’ 혹은 ‘잊지 말라’는 표현이 포함된 대표적인 구절들이다. (출애굽기 13: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애굽, 곧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온 이 날을 기억하라...” (출애굽기 20:8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 신명기 5:15 )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 신명기 7:18 )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 신명기 8:2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 신명기 8:18 )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 신명기 15:15)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 신명기 24:9 )  “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구속하신 것을 기억할지니라...” ( 신명기 25:17–19 )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 전도서 12:1 )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 시편 77:11 )  “내가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리라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기억하리이다.” ( 시편...

[칼럼] 기억하지 않는 인간, 묻기만 하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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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하지 않는 인간, 묻기만 하는 시대 기술이 바꾼 우리의 인지와 사고 방식 "너 그 친구 전화번호 아직도 외우고 있어?" 이제는 이상하게 들리는 질문이 되었다.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  우리는 더 이상 친구의 번호를 외우지 않는다. 머릿속에 저장하는 대신 손 안의 핸드폰 주소록에 맡긴다. 전문가들은 이 현상을 '구글 효과' 또는 '디지털 건망증'이라고 부른다. 필요한 정보를 뇌가 아닌 기기에 저장하면서 인간의 기억 방식 자체가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은 줄었지만 그만큼 뇌는 가벼워졌다. 반복 암기에서 벗어난 인간은 보다 창의적인 사고와 새로운 문제 해결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변화가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결국 기억할 줄 모르는 뇌를 만들 수 있다. 인지 능력 저하와 창의력 감퇴에 대한 우려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찾는 시대'를 넘어 '묻는 시대'로  들어섰다. 과거엔 네이버나 구글에 검색어를 입력하여 찾았으나 이제는 챗GPT 같은 대화형 AI에게 직접 질문하는 방식으로 이동했다. 학생들은 숙제를 묻고, 일반인들은 생활이나 업무의 궁금증을 챗봇에 의존한다. 새로운 정보 접근 방식이 일상화된 지금 인간은 스스로 배우기보다 '누군가에게 묻는 존재',  호모 퀘렌스(Homo quaerens, 질문하는 인간) 로 변모하고 있다. 기술 의존에 대한 시각은 양면적이다. 긍정적 관점에서 보면, AI는 반복적인 작업을 대신함으로써 인간에게 더 많은 창의적 시간과 에너지를 제공한다. 마치 뇌 바깥에 '외장 하드'를 단 것처럼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셈이다. 하지만 반대편에서는 심각한 경고의 목소리를 낸다. 기술이 모든 것을 대신할수록 인간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기억의 퇴화, 사고력의 감퇴, 나아가 인간 고유의 창의성마저 기술에 위협받는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

흐름과 나눔의 지혜 (옹달샘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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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름과 나눔의 지혜 > " 좋은 물 혼자 마시려다 옹달샘을 썩게 하고   편안함에 맛들려 신체를 썩게 한다. " 깨끗하고 단 물이 솟아나는 작은 옹달샘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물을 마시러 찾아왔지만, 어느 날 한 사람이 이 샘터를 독차지하며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혼자서 오랫동안 좋은 물을 즐기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한때 신선했던 옹달샘의 물이 썩기 시작했습니다. 흐르지 못하고 고인 물은 점점 탁해지고 악취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 옹달샘은 아무도 찾지 않는 죽은 샘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교훈을 줍니다. 좋은 것을 나누지 않고 혼자만 소유하려 하면 그것은 곧 가치를 잃게 됩니다. 물이 흐를 때 맑고 신선하듯 재능, 지식, 사랑도 나눌 때 더욱 풍성해지고 빛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많은 편안함과 안락함 속에서만 지내면 몸과 마음이 나태해지고 점차 활력을 잃게 됩니다. 도전과 긴장, 움직임이 없는 삶은 쉽게 무너집니다. 물이 끊임없이 흘러야 맑음을 유지하듯 우리의 인생도 지속적인 노력과 움직임을 통해서만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삶의 모든 좋은 것들은 함께 나눌 때 더 의미가 깊어집니다. 흐르도록 내어주고,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이 삶의 본질 입니다. 옹달샘의 교훈처럼, 흘러가는 물처럼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 때 우리 삶도 더욱 맑고 아름답게 빛나게 됩니다. ##

[한절 묵상] “문제를 푸는 열쇠는 회개이다”(민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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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푸는 열쇠는 회개이다”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피워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  (민수기 16:46) 고라의 반역으로 인한 엄청난 심판을 보았는데도, 백성은 또다시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들을 원망하였다. 그들의 문제는 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내면의 불순종과 완악함에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그냥 두실 수 없었기에 재앙을 내리셨다. 인간의 문제 해결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우리는 외적인 갈등이나 현상을 해결하려 애쓰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마음의 중심, 곧 죄의 뿌리를 다루신다. 회개는 그 뿌리를 뽑는 작업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단순히 무섭게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맞게 항상 일관되게 대응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공의는 오해되고 불평은 계속된다. 그러므로 모든 갈등의 시작점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상황을 바꾸는 열쇠가 아니라 먼저 나 자신을 바꾸는 열쇠이다. 얽히고 설킨 문제의 실타래는 회개의 눈물 앞에서 하나씩 풀리기 시작한다. 진정한 변화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한 고백으로부터 시작 된다.

삶의 키워드 ⑥_관심 –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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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키워드 ⑥ _ 관심 –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시선 “ 관심은 무관심의 장벽을 허문다 .  제때 적절한 인사를 하자 .”  ( 무명) 관심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저 누군가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러주거나 바쁜 하루 속에서도 안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런 소소한 마음들이 모여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따뜻한 다리를 놓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무관심에 익숙해집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바쁘다는 이유로 주변을 돌아볼 여유 없이 하루를 흘려보내곤 합니다. 하지만 작은 관심 하나가 누군가의 마음을 위로가 되고 그 하루를 덜 외롭게 만듭니다. 관심은 타인을 바꾸는 힘이 있다기보다는 나를 더 부드럽고 유연하게 만들어주는 감정 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려던 순간에 다시 한 번 멈추게 하고 몰랐던 얼굴 뒤의 사정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건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관심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익숙함 속에서 당연하게 여겨지기 쉽고 그러다보면 종종 마음이 멀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오래된 관계일수록 작은 관심이 다시 마음을 연결해줍니다. "괜찮아?" "오늘 어땠어?"라는 짧은 말들이 무심해진 사이를 부드럽게 덮어줍니다. 관심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는 온기 입니다. 내가 받은 관심이 따뜻했다면 그 온기를 조금씩 나누어도 좋습니다. 세상은 그런 온기들로 조금씩 더 살 만한 곳이 되어갈 것입니다. 이 글씨는 고 신영복 선생께서 쓰신 글 사본입니다.

[한절 묵상] "예배는 중심이 하나님을 향할 때 온전하다” (민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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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중심이 하나님을 향할 때 온전하다”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명을 불살랐더라 (민수기 16:35) 고라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향로를 들고 회막 문 앞에 섰다. 겉모습은 예배하는 자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 자신의 욕심과 교만을 드러냈다. 결국 하나님께서 내리신 불에 의해 그들은 심판을 받았다. 예배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다. 예배는 우리의 중심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겸손과 경외함 위에 세워져야 한다. 진정한 예배자는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높이며,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본다. 겉으로는 예배하는 듯 보여도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서는 우리의 예배가 전심으로, 경외함으로 드려지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해 드리는 예배를 찾으시고 그런 예배자들을 기쁘게 받으신다.

삶의 키워드 ⑤_진심 – 말보다 깊은 마음의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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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키워드 ⑤ _ 진심 – 말보다 깊은 마음의 결   “ 진심은 길을 돌아도 결국 닿는 법이다 .” ( 무명) 진심은 애써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스며나오는 마음입니다. 조금 느리고 서툴러 보여도 진심은 결국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때로는 말보다 표정이나 눈빛, 작은 행동으로 전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진심을 다해 살고 싶으면서도 종종 망설이게 됩니다. "이 말을 해도 괜찮을까?" "이 마음이 혹시 상대에게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들이 우리를 주춤거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굳이 진심은 포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딘가에서 힘들어하는 이를 향해 다가서는 마음,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웃는 그 순간 그 모든 것이 진심의 모습 입니다. 거창하지 않고 꾸미지 않아도 진심은 조용히 마음을 움직입니다. 진심은 때로 상대방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나 자신을 더 편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내 마음을 숨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표현할 때 비로소 나는 내 자신과도 가까워집니다. 진심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다리이면서, 동시에 나와 나 자신을 잇는 다리이기도 합니다. 물론 진심이 항상 환영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를 사기도 하고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닫을 이유는 없습니다. 진심은 돌아가는 길을 택할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닿습니다 . 그 사실을 믿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글씨는 고 신영복 선생께서 쓰신 글 사본입니다.

[한절 묵상] “하나님이 맡기신 자리에서 충성하라” (민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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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맡기신 자리에서 충성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민수기 16:1)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에 맞는 직분과 사명을 맡기신다. 고라 일당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레위인의 사명을 가볍게 여기고, 모세와 아론을 질투하며 불평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일은 크고 작음이 없으며, 모두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존귀하다. 비교하는 마음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의 가치를 흐리게 만든다. 사역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충성과 겸손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분의 높낮이를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으시고, 맡기신 자리에서 어떻게 충성했는지를 보신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 작게 느껴질지라도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큰 영광을 받으신다. 남의 역할을 탐내기보다는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사하는 소명의식으로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 삶을 복되게 하신다. 오늘도 하나님이 맡기신 자리에서 충성과 만족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섬김이 존귀하다.

하나님의 다른 이름들(별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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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다양한 이름과 칭호가 등장합니다. 각각은 하나님의 성품, 권능, 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른 이름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속성(창조, 전능, 공급, 인도, 치료, 의로움, 평강 등)을 반영하는 다양한 명칭을 사용하였습니다. 신약 에서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아버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강조하며 명칭을 사용하였습니다. 각 이름은 단순한 별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과 인간과의 관계 를 드러내는 깊은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명칭 (히브리어/헬라어) 의미 특징 대표 성경 구절 엘로힘                (Elohim, אֱלֹהִים) 하나님 창조주, 전능자 창세기 1:1 엘                       (El, אֵל) 하나님, 힘, 능력 능력의 하나님 민수기 23:22 엘 엘리온            (El Elyon, אֵל עֶלְיוֹן)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절대주권자 창세기 14:18–20 엘 샤다이            (El Shaddai, אֵל שַׁדַּי) 전능하신 하나님 보호자, 전능자 창세기 17:1 엘 올람               (El Olam, אֵל עוֹלָם) 영원하신 하나님 영원불변하심 창세기 21:33 야훼                   (YHWH, יהוה) 스스로 있는 자 자존자, 영원자 출애굽기 3:14 아도나이          ...

비움의 삶 앞에 선다 (미니멀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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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의 삶 앞에 선다 가득 채운 삶은 번듯해 보이지만 때로는 숨이 막힌다. 빛조차 스며들 틈 없는 방처럼 마음도 꽉 막힌다. 그래서  오늘  나는 한 걸음 물러나 가지고 있던 것을 내려놓아 보기로 했다. 옷장을 덜어내니 바람이 드나들고 책장을 비우니 오래 잊었던 시 한 줄이 나를 반긴다. 서랍 속 작은 상자 하나를 덮으니, 그보다 더 크고 조용한 평화가 펼쳐진다. 비움은 손끝에서 시작되어 마음 끝으로 번진다. 허전한 것이 아니라 새로워지는 일이다.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나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소유의 언어는 “더”지만, 존재의 언어는 “덜”이다. 덜 갖고, 덜 말하고, 덜 흔들릴수록 나는 나에게 더 가까워진다. 비운 자리에 빛이 머문다. 그 빛 속에서 나는 다시 살아갈 방향을 찾는다.

인생에는 연습이 없다. 딱 한번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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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연습이 없습니다. 사전 리허설도, 예행 연습도 없이 우리는 한 번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매 순간 걷고 있습니다. 시간은 오직 앞으로만 흐르고, '다시'라는 말은 인생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 '다음에', '나중에'라는 말로 오늘을 미룹니다. 하지만 '다음'은 절대 확실하지 않습니다. 놓친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영원히 잃어버린 시간이 됩니다.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은 때로 두려움을 줍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이 오늘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듭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기억이 될 수 있기에, 우리는 매 순간을 진실하고 온전하게 살아야 합니다. 인생에는 연습이 없기에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수와 실패는 되돌릴 수 없지만, 그 안에서 배우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전부임을 기억하세요.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온 마음을 다해 살아가세요.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내는 길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에서 속죄제를 드리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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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신앙생활에서 속죄제를 드리는 모습 속죄제(贖罪祭) 란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에서 빗나간 모든 죄에 대하여 청결과 자유를 얻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성경에서 "속죄제를 드린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는 죄를 대신하여 희생 제물을 드려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의식 을 뜻한다. 구약 율법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죄를 사함받기 위해 흠 없는 짐승(수송아지, 염소 등)을 제물로 바쳤고, 이 피를 통해 죄를 덮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했다. 그렇다면 속죄제의 현대적 실천 은 어떤 모습일까? 1. 죄를 자각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기도 개인이 죄를 깨달을 때 무릎 꿇어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이다. "하나님, 제 죄를 용서해 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기도가 현대적 속죄제의 첫걸음이다. 2. 예배 속에서 드리는 회개와 믿음의 고백 예배 초반에 함께 드리는 ' 참회의 기도 '가 있다. 이 시간은 과거처럼 동물을 잡아 바치는 대신  예수님의 피를 믿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는 영적 속죄제이다. 3.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 성찬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이다.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나는 예수님의 속죄로 용서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믿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도 속죄제의 현대적 실천이다. 4. 삶에서 잘못을 돌이키고 행동으로 회복하는 것 누군가에게 잘못했으면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 앞에 잘못된 습관이나 죄를 버리려고 노력하는 구체적 삶의 변화이다. 이는 단순히 말로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속죄를 실천하는 삶 이라고 할 수 있다. 5. 공동체 안에서 화해와 사랑을 이루는 것 교회나 이웃과의 다툼, 미움, 불신을 그대로 두지 않고, 화해하고 용서하는 노력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 이 현대 속죄제의 연장이다.

삶의 키워드 ④_도전 – 삶 속에서 용기를 행동으로 옮기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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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키워드 ④ _ 도전 – 삶 속에서 용기를 행동으로 옮기는 이야기 “ 가장 어려운 것은 행동하기로 결심하는 것이고 , 나머지는 단순히 끈기일 뿐이다 .” — 아멜리아 에어하트 도전은 언제나 거창한 꿈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가 보고 싶은 마음 , 혹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상상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 뒤에 ‘그래도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 순간 이미 도전은 시작된 것입니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 전에는 누구나 망설입니다. 실패하거나 실수할까 봐 두렵고, 자신이 작아 보일까 걱정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도전은 완벽한 확신이 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한 걸음을 내딛는 선택 이 도전입니다. 비록 작은 걸음이라 해도 용기가 필요하며, 그런 발걸음들이 쌓일수록 낯선 길도 점차 익숙해집니다. 도전이 언제나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넘어지거나, 다시 돌아가는 길을 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전의 진정한 가치는 결과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해 내 안의 가능성을 발견 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나는 이런 것도 할 수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은 도전해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귀한 선물입니다. 도전은 반드시 큰 목표일 필요는 없습니다. 처음 시도해보는 요리, 미뤄둔 책 한 권을 읽는 일,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말을 건네는 일... 이러한 작은 행동들이 나를 조금씩 변화 시킵니다. 삶은 익숙한 것들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낯선 곳으로 한 걸음을 내딛을 때, 비로소 자신의 한계와 마음의 깊이를 더 잘 알게 됩니다. 오늘, 작지만 새로운 시도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망설이는 마음 위에 작은 용기를 더해보시기 바랍니다. 도전은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됩니다. 이 글씨는 고 신영복 선생께서 쓰신 글 사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