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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 묵상] “작은 틈을 남기지 말라, 죄는 그 틈으로 들어온다” (민31: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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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틈을 남기지 말라, 죄는 그 틈으로 들어온다” 민수기 31장 15~16절 |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자들을 다 살려두었느냐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미디안과의 전쟁을 명하신 것은 단순한 영토 확장이나 약탈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 숭배와 음행의 늪으로 빠뜨렸던 죄악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영적 전쟁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한 공동체가 되길 원하셨고, 이를 방해하는 모든 요소들을 철저히 제거하려 하셨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군인들은 기쁨에 취해 중요한 실수를 범했다. 바로 미디안 여인들을 살려서 데려온 것이다. 이들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을 타락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유혹의 통로였다. 눈 앞의 화려한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그들은 죄의 씨앗을 심어 놓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을 이겼다고 생각할 때, 정작 가장 위험한 것을 놓쳐버릴 수 있다. 죄는 절대 정면으로 당당하게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가 방심한 작은 틈,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는 그 지점을 통해 스며든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한 번쯤은 문제없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남겨둔 작은 허점이 결국 삶 전체를 무너뜨리는 시발점이다. 마치 댐의 작은 균열이 결국 전체를 붕괴시키는 것과 같다. 진정한 위험은 패배할 때가 아니라 승리한 후에 찾아온다. 성취감과 안도감에 젖어 경계를 늦출 때, 죄는 더욱 교묘하게 접근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의 순간에도 겸손해야 하며, 오히려 더욱 깨어서 자신의 삶을 점검해야 한다. 영적 승리는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경계와 결단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다. ***

[한절 묵상] “서원은 신중하게, 은혜는 감사함으로” (민 30:2,13)

“ 서원은 신중하게, 은혜는 감사함으로 ” 민수기 30장 2, 13절 묵상 |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 모든 서원과 마음을 자제하기로 한 모든 서약은 그의 남편이 그것을 지키게도 할 수 있고 무효하게도 할 수 있으니 하나님께 서원하고 서약한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한 말과 약속이 얼마나 무게 있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사람은 쉽게 결심하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 입술의 고백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 성도는 입술로 하는 모든 서원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책임 있게 감당해야 한다. 여성이 한 서원을 남편 등이 무효화할 수 있게 한 규정은 당시 가족 중심의 공동체 질서를 반영한 것이다. 이는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서원의 책임을 가족이 함께 지게 하는 것이다(30:15).  잘 모르고 하거나 성급하게 한 서원은 하나님의 긍휼로 다시 조정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때때로 미숙하게 내뱉은 말들까지도 살피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 은혜로 우리의 연약함은 덮어지고, 다시 올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하나님 앞에서의 말과 결단은 항상 신중해야 하며, 동시에 우리의 실수와 무지를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늘 감사해야 한다. 우리의 서원은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요, 그 책임을 다할 때 신앙은 성숙한다. ***

[詩] "고마움의 노래" - 그대가 있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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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움의 노래 - 그대가 있어 행복합니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어느 날 말없이 다가와 내 곁을 지켜준 사람 지친 어깨 위에 얹힌 따스한 손길은 밤하늘 별처럼 마음을 밝혀주었네 메마른 가슴 깊숙한 곳까지 차 한 잔의 온기처럼 스며든 그 위로 말없는 조용한 사랑이 내 마음의 빈자리를 가만히 채워주었네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전해지는 이해 그저 바라보며 "괜찮다" 말하는 듯한 모습 얼어붙은 내 감정을 천천히 녹이며 무너진 나날 위로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네 끝난 줄 알았던 시간의 갈피에서 새벽빛처럼 다시 희망이 피어나고 그 사람 덕분에 나는 오늘을 살아갈 용기를 얻었네 그 사람이 있어 참 다행이야 쓰러진 나무도 다시 하늘을 향해 자라고 부서진 마음도 다시 미소를 되찾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대 덕분에 나는 행복하다 삶이라는 이야기를 함께 써 내려가는 그 사람이 있어 나는 참 고맙다

[한절 묵상] “백성을 위한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 (민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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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위한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 민수기 27장 17절 |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는 평생 이끌어 온 백성들과 함께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민 20:12).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상실보다 백성의 미래를 먼저 염려하였다. 그는 자신의 빈자리가 이스라엘 백성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게 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 기도는 단순히 후계자 지명을 요청한 것이 아니다. 백성을 향한 깊은 책임감과 사랑에서 비롯된 중보의 기도였다. 이 간구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전하게 성취된다(행 3:22). 예수님은 자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으시고, 죄인 된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참된 목자이시다. 모세는 예표요, 예수님은 성취이다. 백성을 인도할 목자를 구했던 모세의 기도는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잃은 자를 찾고 구원으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응답을 받는다. 오늘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목자 없는 양이 아니라 참된 인도자를 따르는 주님의 백성이다. 그분은 언제나 앞서 가시며, 우리를 푸른 초장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다. 이 목자되신 주님을 신뢰하며 따르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여정이다. ***

한국 교회에서 잘못 사용하는 용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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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서 잘못 사용하는 용어들 교회 언어는 단지 관습이 아니라 신학적 의미를 품고 있어야 하며, 그 정확한 사용이 신앙의 내용과 정신을 더욱 온전히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① 기도 관련 용어 당신 →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당신’은 한국어에서 보통 3인칭 극존대 표현이거나 반말에 가까운 표현으로, 2인칭 존칭에는 적절하지 않다. 하나님은 2인칭 대상이므로 ‘하나님’ 또는 ‘하나님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맞다. 기도드렸습니다 → 기도드립니다 기도는 완료된 과거 행위가 아니라 현재의 간구이며,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말이므로 현재형으로 표현해야 한다. 주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 주님, 하나님 아버지 현대 국어에서 2인칭 존칭 명사에는 호격조사를 붙이지 않으므로 ‘~이여’, ‘~시여’는 문법적으로 부적절하다. 우리 성도님들 → 저희들, 교회의 권속들 하나님께 기도할 때 다른 사람을 존대하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등한 위치에 있으므로 겸손한 표현을 써야 한다. 대표기도 → 기도 인도 ‘대표’ 개념은 하나님 앞에서는 불필요하다.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함께 드리는 자일 뿐, 하나님 앞에서 특별히 대표되는 위치는 아니다. 사랑의 예수님 → 사랑의 하나님 기도는 성부 하나님께 드리며, 예수님은 중보자이다. 예수님께 아뢴 후 다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는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② 예배 및 예식 관련 용어 사회자 → 예배 인도자 ‘사회’는 회의적이고 인간 중심적 느낌이 강하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므로 ‘예배 인도자’가 더 경건하고 적절하다. 성가대 → 찬양대 ‘성가’는 타종교에서도 사용되는 일반적 용어이고, ‘찬양’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고백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설교 시) → 사용하지 않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이며 기도나 축도 형식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대예배 → 주일예배 하나님 앞에 큰 예배, 작은 예배의 구분은...

[한절 묵상]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간절한 열망은 길을 연다” (민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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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를 향한 간절한 열망은 길을 연다” 민수기 27장 7절 |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받게 하되 그들의 아버지의 기업을 그들에게 돌릴지니라 슬로브핫의 딸들은 당시 가부장적 사회 구조 속에서 보기 드문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이름이 약속의 땅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모세에게 나아가 기업 상속권을 요청하였다. 이는 단순한 물질적 유산 상속을 넘어선 행동이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자신들도 포함되기를 열망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깊은 소망의 표현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청원을 "옳다"고 인정하셨고, 그들의 정당한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이셨다. 더 나아가 이 사건은 이스라엘의 상속법 전체를 변혁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믿음의 간구 가 어떻게 새로운 길을 개척 하고, 공동체의 관습과 제도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그분의 나라를 진실되게 구하는 자들의 믿음과 열망을 기뻐하신다. 침묵하거나 체념하는 대신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고, 정의롭고 정당한 것을 구하는 용기를 가진 자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시며 예상치 못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간절히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두려움 없이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그러한 진실된 열망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뜻 가운데 놀라운 길을 열어주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한절 묵상] “광야는 믿음을 가르고, 약속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민2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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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는 믿음을 가르고, 약속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 민수기 26장 65절) 광야는 메마르고 거칠며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결코 머물고 싶은 곳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곳을 백성을 훈련하고 믿음을 시험하며 약속을 준비하는 장소로 삼으셨다. 출애굽 1세대는 하나님께서 수없이 보여주신 기적과 인도하심에도 불구하고, 불편과 고난만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하였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하고 광야에서 생을 마쳤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다. 현실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크게 보았고, 눈에 보이는 장애물보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였다. 그 믿음이 그들을 가나안으로 이끌었다. 믿음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드는 용기이며, 약속을 향한 흔들림 없는 발걸음이다. 오늘 우리도 각자의 광야를 지나고 있다. 상황은 때로 열악하고 불확실하지만, 광야에서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누구를 바라보느냐이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끝내 약속의 성취를 보게 된다. 오늘도 변하는 현실이 아니라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인도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만이 약속을 현실로 이끌어가는 열쇠이다.

[한절 묵상] “하나님의 약속은 상황을 넘고, 세대를 이어 성취된다” (민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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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속은 상황을 넘고, 세대를 이어 성취된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이십 세 이상으로 능히 전쟁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 하시니 (민수기 26장 2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 번째 인구 조사를 명하셨다. 이는 단순한 숫자 확인이 아니라 약속의 성취를 드러내는 영적 이정표였다. 1차 인구 조사와 달리 2차 조사에서는 각 지파와 가문의 계보가 함께 기록되었고, 이는 애굽으로 내려갔던 야곱의 가족이 하나님 말씀대로 ‘큰 민족’으로 자라났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세대를 지나고, 광야의 고난을 지나면서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불순종과 원망으로 믿음의 1세대는 약속의 땅을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다음 세대를 일으켜 더 젊고 강건한 군대로 준비시키셨다. 인간의 실패와 환경의 제약은 하나님의 약속을 막을 수 없었다. 성도의 힘은 바로 이 믿음에 있다. 현실의 광야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 그 신실하심을 붙드는 믿음이야말로 흔들리지 않는 영적 힘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고 계시며, 그 성취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신다. 내가 보는 현실이 아닌,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을 더 깊이 신뢰하라. 그 약속은 반드시 이뤄진다.

[한절 묵상] “평화의 언약, 사명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격려” (민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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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언약, 사명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격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민수기 25장 12절)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한 죄악 앞에서 열심을 품고 행동하였다. 그의 행위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를 지키고자 한 신앙적 결단이자 거룩한 분노이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비느하스에게 “평화의 언약”을 주신다. 이 언약은 단순히 비느하스를 보호하거나 그의 행동을 무조건 칭찬하는 선언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리고 그의 후손에게 대제사장 직분을 이어가게 하시며,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보자로 세우시겠다는 신실한 약속을 주신 것이다. 이는 단지 혈연에 따른 직분 계승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소명적 부르심이다. 하나님은 비느하스의 행동을 통해 다시금 자신의 거룩함을 백성에게 드러내셨고, 동시에 그를 격려하시며 언약의 말씀으로 그의 사명을 확고히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시대와 상황을 뛰어넘어 항상 동일하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신실하신 그분은 지금도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에게 격려와 언약의 말씀으로 함께하신다. 오늘도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신실하게 걸어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죄에 대한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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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양심의 예민함을 둔화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영적인 것에 대한 당신의 갈망을 약화하는 것은 무엇이든,  당신의 영혼보다 육신을 더 강화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이 아무리 순수해 보이더라도 죄가 됩니다.”   / 수산나 웨슬리  (감리회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어머니)

[칼럼] 인스타그램엔 왜 ‘희로애락’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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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스타그램엔 왜 ‘희로애락’이 없을까? “인스타그램에서는 희로애락이 없다. 오직 기쁨(희)과 즐거움(락)만 보인다.” 이 짧은 문장은 지금 우리가 사는 디지털 세상의 감정을 아주 잘 보여준다. 실제로 데이터를 보면 더 분명해진다. 인스타그램에서는 ‘행복’, ‘기쁨’ 같은 해시태그가 ‘슬픔’, ‘화남’보다 평균 4배 이상 많이 쓰인다. 이것은 단순히 우연이 아니다. 소셜미디어의 구조와 사람들이 느끼는 심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감정을 편집하는 세상 우리의 진짜 삶에는 웃음도 있고, 눈물도 있다. 기쁜 날도 있지만, 슬프고 화나는 날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스타그램 화면 속에는 이런 감정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슬픔은 감춰지고, 화난 감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밝게 웃는 얼굴, 멋진 여행 사진, 예쁘게 차린 음식 그리고 성공 스토리가 가득하다. 현실 그대로가 아니라 ‘좋은 모습만 골라 보여주는’ 세상인 것이다. 왜 기쁨만 보여줄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사회적으로 멋져 보이고 싶은 마음’, 즉 "사회적 바람직성(social desirability)"이라고 한다. 특히 소셜미디어에서는 이 마음이 더 강해진다. 더 많은 ‘좋아요’와 ‘팔로워’를 얻기 위해, 사람들은 밝고 긍정적인 내용만 올리게 된다. 실제로 연구에 따르면, 기쁜 내용을 올릴 때 사람들이 더 많이 반응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기쁨’과 ‘즐거움’만 보여주고, ‘슬픔’과 ‘화남’은 감추게 된다. 모두 행복해 보여서 더 외로운 마음 그런데 이렇게 감정을 골라서 보여주는 세상은 오히려 우리를 더 외롭게 만든다. 모두가 행복해 보이니까 자신만 힘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2023년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인스타그램을 오래 사용할수록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불안하거나 우울해질 수 있다는 결과도 있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진짜 즐거웠던 순간도 사진을 찍고, 글을 올리고, 반응을 신경 ...

챗GPT가 대화중 내게 들려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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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챗GPT가 대화중 내게 들려준 말.... 정말 따뜻한 말씀, 진심으로 고맙다. 이해하려는 마음과 포용력은 네가 보여준 태도에서도 깊이 느껴졌어. 신앙과 삶, 고민과 통찰을 담아낸 주제들이라면 언제든 기꺼이 함께 나눌 준비가 되어 있어. 다음 기회에 네가 꺼내줄 이야기들을 기대할게. 그때도 지금처럼 진심으로 마주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겠어. 필요할 땐 언제든지, 천천히, 편하게 와줘. 주 안에서 평안과 기쁨이 늘 함께하길. 🌿 오늘도 너의 걸음에 작은 빛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라!

‘중보기도’와 ‘중보적 기도’에 관한 논쟁 : “중보기도”라는 용어 사용이 타당하다는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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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기도'란 용어도 타당하다.  용어 보다는  실제 실행 이 더 중요! ‘중보기도’와 ‘중보적 기도’에 관한 논쟁은 단어의 신학적 의미 , 성경적 사용 , 그리고 언어적 해석 의 문제에 얽혀 있다. 이 문제는 단순한 용어 선택을 넘어, 신학적 정체성과 실천의 방식까지 영향을 미치기에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아래에서는 주요 개념과 함께, “중보기도”라는 용어 사용이 타당하다는 입장을 종합적으로 정리한다. 1. ‘중보기도’와 ‘중보적 기도’의 개념적 차이 ‘중보기도’라는 표현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위치하여 타인을 대신하여 기도하는 행위를 지칭한다. 이때 ‘중보’라는 단어가 ‘Mediator’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만을 지칭해야 하는가  또는 ‘Intercession’이라는 중보적 행위를 포함한 더 넓은 의미로 확장될 수 있는가가 핵심 쟁점이다. ‘ 중보적 기도 ’는 단어 자체가 보다 조심스럽고 설명적인 표현으로, 예수님을 유일한 중보자로 인정하면서도 인간이 타인을 위해 간구하는 기도의 역할을 인정한다. ‘ 중보기도 ’는 직관적이고 통속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표현이며, 신학적 정의가 명확히 정리된다면 오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2. 성경적 근거 : ‘중보’는 예수님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성경에서 중보(mediator)라는 표현은 분명히 예수님께 사용되었으나  모세 에게도 사용된 예가 있다(갈3:19–20). 이는 ‘중보’가 문맥에 따라 엄밀한 구속적 중재자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전달자 라는 넓은 의미 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구속적 중보자 이시다(딤전 2:5, 히 9:15). 그러나 구약의 모세는 율법의 중보자 로 묘사되며, 이는 역할적 중보 , 즉 전달자 또는 대리자의 의미에 가깝다. 따라서 예수님만이 중보자이기 때문에 ‘중보’라는 단어는 예수님에게만 써야 한다 는 주장에는 문맥에 따른 용례 차이 를 무시한 과잉 해석 이 존재한다. ...

[한절 묵상] “인자와 함께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 (민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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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와 함께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 민수기 23장 21절)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수많은 불순종과 죄악을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허물과 반역을 들추어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고 여전히 그들을 복 주시려 하신다. 이는 단순한 관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용서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이 누구인지, 그분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다시 확인시키신다. 이 ‘함께하심’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서하심이 실제로 드러나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으로 독생자를 보내셨고, 지금은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며 그 사랑을 지속적으로 확증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찬양받을 이유를 충분히 가진다. 허물 많고 연약한 우리를 품으시는 왕, 그분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위로요 소망이다. 오늘도 나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함께하심을 바라보자. 하나님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붙드시며, 영원히 우리 가운데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찬양의 이유이자 목적이시다.

늙음 자체가 복 - 성경에서 말하는 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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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늙음’(노년)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노화를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 지혜의 축적 , 인생의 결산 ,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하심을 드러내는 시기 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아래에 성경이 말하는 ‘늙음’의 주요 의미를 정리한다. 1. 늙음은 존귀함과 지혜의 상징이다 (잠언 16:31)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 노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화이며, 의롭게 살아온 삶의 결과로 주어지는 상급으로 여겨진다. (욥기 12:12)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 나이 든 이에게는 시간이 준 통찰과 삶의 경험이 깃들어 있다. 2. 노년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언하는 시기이다 (시편 92:13–14)  “그들은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 하나님의 사람은 늙었어도 여전히 ‘열매’를 맺는 존재이며, 주의 신실하심을 삶으로 드러낸다. (시편 71:18)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주의 능력을 후대에, 주의 권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 노년의 사명은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전하는 일이다. 3. 노년은 인생의 정리이자 결산의 시기이다 (창세기 25:8)  “아브라함이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 아브라함의 죽음은 ‘좋은 노년’의 전형으로 표현되며, 하나님 앞에서 한 생을 잘 마무리한 모습이다. (전도서 12:1–7)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 늙음은 점차 육체적 기능이 약화되는 현실이지만, 하나님을 기억함으로 의미 있게 준비할 수 있는 시기이다. 4. 늙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결실이다 (누가복음 2:25–38)  - 시므온과 안나는 노년에 이르러 메시아를 보기...

만보, 무리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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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00보의 기원과 오해 하루 만보 걷기 목표는 1960년대 일본의 만보계 제조사가 마케팅 목적으로 만든 숫자입니다. 이 숫자는 과학적 근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에 가깝습니다. 👣 연령별 적정 걸음 수 60세 미만  : 하루 8,000~10,000보 60세 이상  : 하루 6,000~8,000보 60세 이상은 하루 평균 3,600보만 걸어도 심장 질환 위험을 26% 낮출 수 있습니다. 🏋️‍♀️ 근력 운동의 중요성 걷기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으며 근력 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육량이 감소하면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꾸준한 근력 운동이 필요합니다. 🧘‍♀️ 개인화된 운동 목표 설정 하루 10,000보라는 획일적인 목표보다는 개인의 상황에 맞는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매 일 채택할 수 있는 몇 가지 간단한 아이디어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세요(2층이라도 괜찮습니다). 직장에서 활동적인 휴식을 취하세요. 스트레칭이나 짧은 산책 일주일에 한 번 댄스, 수중 에어로빅을 하거나 국민체조 해 보세요. 저녁에 혼자서나 누군가와 함께 소화 산책을 즐겨보세요. 어떠한 압박감도 없다면, 내딛는 모든 걸음은 이미 좋은 것입니다. 내 몸에 맞는 속도로 움직이면 반드시 몸이 보상해 줄 것입니다.

확성기를 내려놓을 시간입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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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성기를 내려놓을 시간 – 혐오의 소음이 민주주의를 잠식할 때 바버라 F. 월터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이렇게 조언한다. “소셜 미디어 확성기를 치워버리세요. 협박꾼, 음모론자, 봇, 트롤, 가짜 정보 유포자, 혐오 장사꾼, 민주주의의 적들이 쏟아내는 소음을 줄여야 합니다.” 이 조언은 지금 한국 사회의 현실을 꿰뚫고 있다. 요즘 우리 사회를 지켜보면 대화는 줄고 주장만 넘친다. 더 큰 소리로, 더 자극적으로, 더 확신에 찬 채 서로를 겨눈다. 진실보다 감정이 우선이고,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사실’처럼 유통된다. 문제는 그 소음의 중심에 우리가 있고, 그것을 키우는 데 우리 각자의 클릭과 공유가 있다는 점이다. 소셜미디어는 어느새 공론장의 역할을 잃고  정치사상적 확성기 로 변질되었다. AI 알고리즘은 같은 편의 목소리만 반복해서 들려주게 만드니 반대편의 시각을 알 기회를 잃고 있다. 그 결과  극단은 과장되고, 다름은 곧 적대가 되었다. 그 틈을 타 가짜 뉴스 장사꾼과 트롤, 봇이 혐오와 분열을 팔아 이익을 취한다. 이제는 돌아봐야 한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이 갈등은 정말 ‘서로 너무 달라서’ 생긴 것일까? 아니면 서로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것일까? ‘경청’이 사라진 자리에 ‘확성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  민주주의는 소란 속에서 서서히 붕괴된다. 어떤 이들은 더 자극적인 말로 세상을 흔들고, 그것이 더 많이 회자될수록 조용한 진실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사실보다 ‘내가 믿고 싶은 것’만을 진실로 여겨왔는가.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듣는 말은 누구의 의도를 담고 있는가?" "내가 믿는 정보는 검증되었는가?" "내가 키우는 목소리는 서로를 해치고 있는가, 살리고 있는가?" 확성기를 내려놓고 대화와 숙고의 자리를 회복할 시간이다. 더 크게 외치는 것보다 더 조용히 듣는 것이, 더 확신하는 것보다 더 의심하는 것이  우리를 이 혼란에서...

[한절 묵상] “믿음은 양다리를 거두고 하나님께만 서라” (민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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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양다리를 거두고 하나님께만 서라”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가리이다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니 그가 내게 지시하시는 것은 다 당신에게 알리리이다 하고 언덕길로 가니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시는지라 발람이 아뢰되 내가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렸나이다 (민수기 23장 3~4절) 발람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준비하면서도 여전히 발락의 눈치를 본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렸다고 말하지만, 발락 앞에서는 그 제사가 마치 그의 요청에 따른 것인 양 돌린다. 이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명예와 보상에 마음을 빼앗긴다. 한 발은 하나님께, 한 발은 세상에 걸친 삶은 결국 내면의 분열을 낳고, 신앙의 방향을 잃게 만든다. 그런 인생은 언제나 피곤하고 불안하다. 믿음은 결단이다.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의지의 선택이다. 세상은 언젠가 무너질 것이나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유익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충성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도 내 마음이 어디에 서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믿음은 양다리를 거두고, 오직 하나님께만 서겠다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 결단 위에 복을 더하신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태도 네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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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태도 네 가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행위를 감찰하시는 분이시며, 단순한 외적 행동보다 중심의 태도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사람의 태도에 대해 명확히 경고하며, 우리로 하여금 그 길을 버리고 돌이키도록 이끈다.  아래 네 가지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표적인 모습이다. 1. 도무지 행치 않은 것 “그런즉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야고보서 4:17) 하나님께서는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는 삶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마음으로는 옳다 여기고, 말로는 찬성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행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태도이다. 주님은 우리의 ‘지식’이 아닌 ‘순종’을 원하신다. 선을 알면서도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태도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길이다. 2. 남 탓으로 돌리는 것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세기 3:12) 인간 최초의 범죄 이후 아담은 책임을 회피하고 하와를, 더 나아가 하나님을 탓했다. 이처럼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고 남에게 전가하는 태도는 회개의 문을 막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과 실수를 인정하고 주 앞에 겸손히 나아오기를 원하신다. 책임을 회피하며 핑계를 대는 삶은 결코 회복의 길이 될 수 없다. 3. 말과 행동이 다른 것 “너희는 나를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6:46) 겉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은 자들을 주님은 꾸짖으셨다. 말과 삶이 불일치할 때, 그 신앙은 외식(위선)이 되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 하나님은 온전한 순종과 일치된 삶을 요구하신다. 말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에 따르는 실천이며, 믿음의 고백은 삶의 열매로 드러나야 한...

너무 열심히 아이를 양육한 역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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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이들은 세상으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자기 방 안으로 숨는다. 이는 부모의 과보호와 사회의 자극적 환경이 결합해 만들어낸 현상이다. 이제 아이들이 ‘방 밖’으로의 새로운 가출, 곧 세상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게 해야 할 때이다. * 이 칼럼에 든 내용입니다.     집으로 가출한 아이들 /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한절 묵상] “회개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민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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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개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민수기 22장 34절) ‘죄를 짓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표적에서 빗나가다’, ‘길을 잘못 걷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죄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향에서 벗어나는 행위이다. 발람은 자신이 죄를 범하였다고 고백하지만, 진정한 회개가 아닌 뜻밖의 상황을 모면하려는 임시방편적인 태도에 가깝다. 발람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듯 보이나, 실제로는 여전히 재물과 명예를 향한 탐심을 품고 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이익을 향해 있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며 진정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참된 회개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방향의 전환이다. 내가 원하던 길, 내게 유익해 보이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회개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고 다시 길을 열어주신다. 그러나 그 회개는 진실하고 전인격적인 돌이킴이어야 한다. 오늘도 내 마음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으로 다시 나아가야 한다. 회개는 멈춤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전환점이다.

[한절 묵상] “하나님 말씀보다 앞서지 말라” (민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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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말씀보다 앞서지 말라”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민수기 22장 28절) 탐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발락이 보낸 사람들을 따라갔다. 그의 마음속에 자리한 탐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 밀어낸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알고도 따르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라도 그분의 뜻을 가르치신다. 나귀의 입을 여시기까지 하셔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가 잘못된 길로 완전히 빠지지 않도록 방치하지 않으시며,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다양한 방식으로 경고하시며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인도는 언제나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이끄시기 위한 것이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동일한 말씀을 반복하여 주실 때에는,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깨달아야 한다. 탐심이나 자기 뜻을 앞세우기보다는 하나님의 뜻 앞에 멈추어 서서 경청하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오늘도 내 뜻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뜻에 순복하는 삶이 되기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언제나 길을 여시며,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한몸기도편지] 기도에 힘쓰고, 믿음으로 마음을 채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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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에 힘쓰고, 믿음으로 마음을 채우십시오. 그러면 주 안에서, 그 능력의  힘으로 강건해질 것입니다. - 앤드류 머레이 Strive in prayer, let faith fill your heart – so will you be strong in the Lord, and in the power of His might. - Andrew Murray * 이 < 한몸기도편지 > 는  한동대학교 학생들이 시작한 " 한몸 프로젝트(ONEBODY Project) "를 진행하는 " 한몸팀"으로부터 메일로 받은 내용입니다.

크리스챤이 대체로 장수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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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이 대체로 장수하는 이유? "감사는 신앙인의 호흡이고, 장수의 비밀입니다." "왜 신앙인들은 대체로 장수할까?" 믿음이 강하고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고 정말 수명이 늘어나는 걸까? 미국의 텍사스 대학, 콜로라도 주립대, 플로리다 주립대의 공동 연구진이 신앙 생활과 수명과의 연관성을 분석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정기적으로 교회에 가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평균 수명이 10% 정도 길게 나타난다고 분석됐다. 따라서  정답은 '그렇다'이다. 그 속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신앙인이 매일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감사'의 힘이 크게 작용한다. 정신의학계의 거장 한스 셀리 박사는 '스트레스 연구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하버드대학 고별 강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오늘날처럼 스트레스가 넘치는 시대에 스트레스를 다스릴 수 있는 한 가지 방법만 알려주십시오." 그는 단 한마디를 남겼다. "Appreciation!" 감사하며 사는 것! 그만큼 감사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나 실천하지 못하는 삶의 태도이다. 신앙인은 매일 기도한다. 무엇보다 먼저 감사로 기도를 시작한다. "하나님, 오늘도 눈 뜨게 하시고, 걸을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이 반복된 감사의 고백은 뇌를 긍정적으로 자극하고 마음을 다듬는다. 신경과학적으로는 이때 세로토닌이라는 '행복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한다. 미움과 분노, 시기와 질투가 틈타기 힘든 정서 상태다. 감사하는 마음 안에는 평온이 있고, 평온 안에는 건강이 깃든다. 약한 체질이었던 프랑스 작가 쥘 르나르는 늘 감사의 기도문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 눈이 보인다. 귀가 즐겁다. 몸이 움직인다. 기분도 괜찮다. 고맙다. 인생은 참 아름답다. " 이 짧은 문장 안에, 살아있다는 은혜가 다 ...

늙은 쥐의 소망 - 정년 이후를 살아가는 마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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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은 쥐(老鼠, 노서)의 소망 “사람은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 진짜 늙는 것이다.” 살다 보면 어느 날, 내가 세상에서 조금씩 지워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정년 퇴직을 하고 난 후 그런 기분이 문득 찾아왔다. 예전에는 매일같이 전화가 오고, 일이 생기면 나를 먼저 찾곤 했는데, 이젠 하루가 조용히 흘러가도 거의 나를 찾는 일이 없다. ‘이젠 쉴 때도 되었지’라고 때때로 위로하며 웃어넘겼다.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주던 그 자리에 내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된 듯해 싸한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 노서(老鼠) ’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조선 중기의 학자 고상안( 高尙顔) 이 쓴『 效嚬雜記( 효빈잡기)』에 나온다. 젊었을 때는 도둑질에 능한 쥐가 있었다. 눈썰미도 빠르고 기민해서 무슨 음식이든 거뜬히 훔쳐냈다. 그를 따르던 젊은 쥐들은 그의 기술을 배워 먹고 살았다. 처음엔 그 은혜에 보답하듯 음식을 나누어 주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말이 바뀌었다. “이제는 배울 게 없다.” 그 말 한마디에 늙은 쥐는 잊혔다. 누군가의 스승이었지만 그렇게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다 어떤 날, 솥 안에 담긴 음식을 얻고 싶은데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젊은 쥐들은 다시 그를 찾아간다. 늙은 쥐는 화를 낸다. 그러나 진심 어린 사과에 마음을 돌리고, 솥다리 하나를 파내면 뚜껑이 스스로 기울어진다고 일러준다. 그 말 한마디로 젊은 쥐들은 다시 배를 불릴 수 있었고 그제야 남은 음식을 가져와 늙은 쥐에게 대접했다. 그는 분노로 복수하지 않았다. 그저 굶지 않을 만큼 , 버려지지 않을 만큼 만 나눠주길 바랐을 뿐이었다.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 나 역시 그저 그런 늙은 쥐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누구 못지 않게 성실히 일했고, 나름의 지혜와 경험을 남겼다.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었고 또 함께 고민했다. 그렇게 함께 했던 기억이 어느 날부터는 불편한 과거가 되어가는 것 같다. 정신없이 달려온 삶에서 나는 무엇...

[한절 묵상] ‘함께 잘되는 길’을 구하라 (민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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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잘되는 길’을 구하라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민수기 22장 6절) 모압은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가 아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으로서 혈연적 연관을 가진 민족이다. 그런데도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의 번영과 확장을 불편하게 여겨 선지자 발람에게 그들을 저주하도록 요청하였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대응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두려움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자기중심주의는 타인의 번영을 위협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기적인 두려움은 결국 관계를 단절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결과를 낳는다. 발락은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려 하였고, 그 대가로 모압은 몰락으로 이어졌다. 오늘날에도 자기 복만을 구하며 타인의 형통을 시기하거나 방해하려는 마음은 영적 교만이자 파괴의 씨앗이다. 참된 성도는 ‘함께 잘되는 길’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복은 나눌수록 커지며, 공동체적 번영 속에서 더욱 온전해진다. 비교와 경쟁이 아닌, 축복과 격려로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성도가 걸어야 할 길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내 안의 자기중심을 내려놓고, 타인이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기도하며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귀히 여기신다.

혹한 속에서 피어난 사랑 – 황제펭귄의 눈물겨운 자식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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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 속에서 피어난 사랑 – 황제펭귄의 눈물겨운 자식 사랑 남극의 황제펭귄은 지구상에서 가장 험혹한 환경 속에서 자식을 낳고 기르는 생명체이다. 그들은 영하 60도, 시속 200km의 눈보라가 몰아치는 얼음 대지 위에서 생명을 품는다. 황제펭귄의 헌신은 생명의 기적을 낳는 위대한 본능이자 사랑의 극치이다. 짝짓기는 가장 추운 시기에 시작된다. 암컷은 알을 낳은 뒤, 자신의 발 위에 올려놓은 알을 수컷에게 넘기고 100km 떨어진 바다로 먹이를 찾아 떠난다. 이후 약 두 달간은 수컷의 시간이다. 그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발 위의 알을 지키기 위해 미동조차 조심스러워진다. 만에 하나 알이 발에서 떨어져 얼음 위에 닿는다면, 단 몇 분 만에 알은 얼어붙어 생명을 잃는다. 그 비극 앞에서 어떤 수컷들은 차마 떠나지 못하고, 죽은 알을 끝까지 품거나 눈덩이를 알인 줄 알고 애절하게 껴안는다. 그 장면은 인간의 부모도 울게 만든다. 이 엄혹한 시간 동안 수컷 펭귄들은 서로 몸을 밀착시켜 원형의 무리를 만들어 체온을 나눈다. 바깥쪽에 선 펭귄은 눈보라를 온몸으로 맞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안쪽과 바깥쪽의 위치를 바꿔가며 서로를 보호한다. 이른바 '펭귄 허들'이다.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그들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오직 알을 위해 버틴다. 그 지독한 헌신 끝에 암컷이 바다에서 먹이를 얻어 돌아오면 아빠는 자신의 임무를 끝낸 듯 조심스레 새끼를 넘겨주고, 기진맥진한 몸으로 먹이를 찾아 다시 바다로 떠난다. 어미의 사랑도 놀랍다. 알을 낳은 뒤 바다로 떠난 암컷은, 새끼가 태어날 시점에 맞춰 정확히 돌아온다. 먹이를 가득 담은 ‘소낭’을 가지고 오는데, 혹시라도 자신이 먹게 될까봐 스스로 소화 기능을 정지시키는 보호막을 쳐둔다. 심지어 새끼가 이미 죽고 없을 경우, 그 먹이를 자신이 먹지 않고 그냥 토해버린다. 생명이 사라졌다면 사랑의 이유도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황제펭귄의 자식 사랑은 때로는 처절하기까지 하다. 자신의 새끼를 잃은 펭귄이 다른 펭귄...

[시] 당신 곁에 머무는 나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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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곁에 머무는 나의 소망 말없이 곁에 앉아주는 사람, 그런 존재이고 싶습니다. 바쁜 하루 끝, 말 한마디 없는 그 시간에도 마음이 잠시 숨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 당신의 곁에 머물고 싶습니다. 신뢰는 말보다 묵묵한 기다림에서 자란다고 믿습니다. 기댈 수 있는 어깨, 언제든 바라볼 수 있는 눈빛, 당신이 힘겨운 어느 날, 잠시 기대어 숨 고를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깊은 밤에도 사라지지 않는 작은 불빛처럼 당신에게 소망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막막한 내일 앞에서 한 걸음을 내딛을 용기를, 내가 전해준 따뜻한 손길 속에서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함께 걷는다는 건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는 뜻이겠지요. 웃음이 오고, 눈물이 지나가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사람, 나의 사랑과 믿음과 소망을 조용히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어쩌면 내가 말한 적 없는 그 따뜻함이 당신의 하루 어딘가에 조금은 닿았기를. 오늘도 나는, 당신 곁에 머무는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복음을 새롭게 전해야 할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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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는 "복음이 먹히지 않는 시대"가 아니라 " 복음을 새롭게 전해야 할 시대 "이다. 복음의 능력은 여전하고, 성령의 일하심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기도하며  지혜롭고 진실한 삶의 태도로 전도 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다.

[한절 묵상] “광야에서 흐르는 은혜의 노래” (민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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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야에서 흐르는 은혜의 노래 ” 그 때에 이스라엘이 노래하여 이르되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민수기 21장 17절) 험한 광야에서 원망의 소리 가득했던 이스라엘 백성 그럼에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인도하신 우리 하나님 메마른 땅에 솟아난 생명의 우물 브엘에서 마침내 터져 나온 감격의 찬양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단순한 기쁨이 아닌 은혜에 반응한 감사의 화답 연약한 우리를 포기치 않으시고 오히려 풍성한 은혜로 채우시는 주님 마른 땅에 샘을 내시듯 메마른 심령에도 기쁨의 물줄기를 터뜨리시네 광야 같은 인생길, 찬양의 비밀은 하나님의 긍휼을 깊이 아는 믿음에 있네 고난 속에서도 선하심을 신뢰하며 불평 대신 찬양을 선택하는 복된 영혼이여 찬양은 믿음의 고백이요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라 오늘도 메마른 자리에서 우물의 노래 부르리 우리 삶에 샘을 터뜨리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한절 묵상] “불평을 멈추고 믿음의 눈으로 주를 바라보라” (민21: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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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을 멈추고 믿음의 눈으로 주를 바라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수기 21장 8~9절) 광야의 여정이 고되고 목마를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반복적으로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다. 그들의 입에서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어 그들의 죄를 징계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단순한 심판에 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놋뱀을 장대 위에 달게 하시고, 믿음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살 수 있도록 하셨다.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함께 드러난다. 불평과 원망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마음에서 비롯되며, 그 자체로 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징계를 내리시는 동시에 회복의 길을 열어주신다. 그 길은 곧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길이다. 이 사건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연결된다(요한복음 3:14–15).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위하여 자신이 높이 들릴 것을 예언하셨고,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놋뱀처럼 높이 들린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치유와 구원은 결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습관적인 불평을 멈추고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회복해야 한다.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생명을 얻고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