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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돌을 맞은 손자 ‘바움’을 위한 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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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돌을 맞은 손자 ‘바움’을 위한 기도문> 사랑의 하나님, 저희 손자 바움이가 하나님의 은혜로 한 돐을 맞이하고 축하하게 하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처음 세상에 태어난 그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건강하게, 사랑스럽게 잘 자라게 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찬양합니다. 작고 여린 생명 위에 언제나 주님의 보호하심이 있었기에 저희는 두려움 속에서도 믿음으로 이 아이를 안아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바움이가 앞으로도 주님 안에서 은혜로 자라게 하시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진리를 따를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주님을 가까이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주소서. 무엇보다 바움이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삶의 모든 걸음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길 간절히 원합니다. 어려운 길 위에서도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허락해 주시고, 하나님이 바움이에게 주신 특별한 재능과 꿈을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기쁘게 걸어가게 하소서. ‘나무’라는 뜻을 가진 바움이라는 이름처럼,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뿌리를 내리고, 시절을 따라 열매 맺으며 잎이 시들지 않는 복된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백향목처럼 곧고 아름답게 자라나 푸른 그늘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쉼과 위로를 주는 따뜻한 사람으로 자라게 하소서. 바움이의 부모에게는 이 아이를 믿음으로 잘 양육할 수 있는 지혜와 인내를 주시고, 또한 바움이에게 필요한 모든 환경과 형편에 맞게 물질도 채우시는 은혜도 주시옵소서. 저희 조부모들을 포함하여 온 가족이 늘 기도하며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믿음과 건강을 허락해 주소서. 바움이의 첫 돐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평안과 복을 넘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바움이의 모든 날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가족의 따뜻한 품 안에서 언제나 기쁨과 감사로 채워지게 하소서. 마지막으로, 성경 민수기 6장 24절부터 26절 말씀으로 바움이를 축복합니다. ...

[ 손주 바움의 첫 돐을 축하하는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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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바움(Baum)이에게 첫 번째 생일을 맞은 소중한 손주에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마음을 담아 이 편지를 보낸단다. 우리에게 참 귀한 바움아, 오늘은 너와 우리 모두에게 매우 특별한 날이구나. 이 세상에 너라는 소중한 존재가 태어난 날을 함께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이야. 너와 함께 한 이 1년은 우리에게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귀하고 사랑스러운 시간이었단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 너를 태중에 품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의 그 벅찬 감격, 너를 품에 안았던 그 따뜻한 순간, 작고 포근한 네 몸, 고요한 숨결,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던 맑은 눈빛... 그 모든 순간들이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선명히 남아 있단다. 네가 환한 웃음를 짓는 얼굴, 작은 손으로 우리 손가락을 꼭 잡던 순간, 옹알이로 뭔가 말하려는 듯한 귀여운 모습들까지. 그때 우리는 분명히 느꼈지. 바움이는 하나님이 우리 가족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라는 것을. 소중한 믿음의 자녀인 바움아, 나무라는 뜻이 담겨진 바움이라는 네 이름과 같이, 시냇가에 심겨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고 잎이 시들지 않으며 형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성경에 나오는 백향목처럼 든든하고 아름답게 자라나길 우리의 바람과 기도를 담아 축복한다. 무엇보다 바움이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살기를 소망한다. 인생의 길을 함께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네가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바란다. 푸른 나무 밑에서 많은 사람들이 쉼을 얻듯이, 바움이도 사람들에게 따뜻한 품을 내어주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단다. 또한 네 환한 웃음이 언제나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몸도 마음도 튼튼하게 자라며, 하나님이 바움이에게 주신 특별한 재능과 꿈을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기쁘게 걸어가며, 바움이만의 색깔과 빛을 세상에 아름답게 펼치길 언제나 응원할게. 축복한다, 우리 바움아, 너의 첫 생일을 기뻐하며 진심으로 축하해! 지금까지 엄마 아빠의 ...

"~없다" 시리즈(2) - "세상에 공짜는 없다,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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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공짜는 없다,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보이지 않는 비용의 실체 겉보기에는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조금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누군가의 시간, 노력, 자원이 투입된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무수한 '무료'하는 게 실제로는 정교하게 설계된 경제 생태계 속에 들어 있다. 현대 사회의 '공짜' 메커니즘 무료로 이용하는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생각해보자. 사용자가 돈을 내지 않지만, 대신 개인정보와 행동 패턴이라는 '데이터 화폐'를 지불하고 있다. 플랫폼은 이를 광고주에게 판매해 수익을 창출한다. 공짜 샘플이나 무료 체험 서비스 역시 단순한 선의가 아니다. 장기적 고객 관계 구축을 위한 계산된 투자다. 우리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부모의 헌신적 돌봄조차 그들의 시간, 감정적 에너지, 경제적 희생이 고스란히 녹아든 결과물이다. 물론 가족 간의 사랑이 조건부는 아닐지라도 그것이 '비용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감사와 상호성의 윤리 이런 현실을 직시한다고 해서 세상을 차갑게 계산하자는 건 아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손길'의 가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대한 진정한 감사를 표현하자는 의미다. 받은 것의 무게를 아는 사람만이 진심으로 고마워할 줄 안다. 받은 만큼 돌려주려는 의식적 노력, 직접 보답이 어렵다면 그 선의를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하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이런 개별적 실천들이 집적되어 사회 전체의 신뢰와 협력 기반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가치를 읽는 눈 궁극적으로 '공짜의 진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숨겨진 가치를 감지하는 안목 을 기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갖춘 사람은,      받은 도움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할 줄 안다      자신이 누리는 혜택 뒤에 숨은 노력을 인정한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공짜'가 되고...

🎧 "내가 들으리니" - 영적 경청의 자세

 🎧 "내가 들으리니" - 영적 경청의 자세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시편 85:8) 히브리어 에쉬마 (אֶשְׁמָע)는 단순한 '듣기'가 아닙니다.  적극적인 경청입니다.  그것은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여는 영혼의 청취 를 의미하며, 나아가 듣고 그대로 행하려는 순종의 자세 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삶을 조율하려는 결단의 자세 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매체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혼돈스런 뉴스, 소셜미디어, 각종 알림음들로 인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쉽게 묻혀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듣고 있는가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1. 의도적인 침묵의 시간 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귀 기울이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의 소리를 줄여야 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침묵의 시간을 의도적으로 만들고, 말씀 앞에 머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2.  말씀 앞에서의 겸손한 자세 가 요구됩니다 말씀은 고개 숙인 자에게 임합니다. 스스로 충만한 자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려 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심령은 말씀 앞에서 늘 배우고자 합니다. 3.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의 준비 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실천할 각오'로 들어야 하며, 마음속 깊이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동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 입니다. 귀로 듣되 마음으로 품고 또한 삶으로 살아내는 것. 그것이 참된 '영적 경청'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 앞에 조용히 앉아 이렇게 고백해 봅시다. " 내가 들으리니,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 말씀이 나를 살게...

"~없다" 시리즈(1) - "인생에 정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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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란 미리 쓰여진 시나리오가 없는 무대와 같다. 정해진 대본도, 완벽한 연출 지침서도 없다. 우리는 모두 즉흥 연기자가 되어 매 순간 새로운 장면을 써 내려간다. 그래서 타인의 성공담을 따라 해보지만 같은 재료로도 요리사마다 다른 맛이 나듯 삶의 결과는 누구에게나 다르게 펼쳐진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전혀 다른 배경과 가치관, 경험이라는 '양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자주 묻는다. "이게 맞는 길일까?" 그러나 선택엔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없다. 중요한 건 그 선택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성장하느냐이다. 실패처럼 보였던 경험도 결국은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된다. 어떤 이는 고속도로처럼 직진하고, 어떤 이는 골목길을 구불구불 돌아가며 풍경을 즐긴다. 산을 오르는 사람도 있고,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도 있다. 모든 길이 다르지만, 모든 길에는 저마다의 의미가 있다.      "인생에는 답이 없다. 다만 각자의 해석이 있을 뿐이다." 이 말은 체념이 아니다. 자유에 대한 선언이다. 남들의 기준에 맞춰 살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방식으로 인생이라는 캔버스를 채워가면 된다. 정답을 찾으려 애쓰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나만의 방식을 발견해보자. 그 속에서 피어나는 해석들이 결국 당신만의 인생 철학이 될 것이다. 급할 것 없다. 해석은 살아가는 여정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완성되어간다. 그리고 그 완성된 해석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당신만의 답이 될 것이다. ***

[한절 묵상]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 (시 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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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     시편 84편 5절 |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온의 대로’는 단순한 물리적 길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열망이 마음 중심에 새겨진 삶의 방향을 상징한다. 이는 우리 인생의 나침반과도 같은 영적 지향점이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다. 성공을 향한 길, 부를 추구하는 길, 명예를 좇는 길... 그러나 참으로 복된 사람은 그 모든 길들 중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의 인생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있고, 그 여정에서 필요한 힘과 위로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온다. 그 특별함은 고난의 시간에 더욱 빛난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것이 많은 샘의 곳이 되며…”(시84:6절) 말씀처럼 절망의 골짜기에서조차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한다. 고통의 자리는 기적의 통로가 되고, 슬픔의 땅은 샘이 터지는 생명의 자리로 바뀐다. 그리고 결국 그는 시온, 곧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간다. 복 있는 인생의 본질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첫째, 하나님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이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감정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향한 깊은 목마름이다. 둘째, 주께서 주시는 힘에 대한 의존이다.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겸손한 자세이다. 셋째, 그 길을 향한 꾸준한 순례의 태도이다. 일시적 열정이 아닌 평생에 걸친 지속적인 여정의 자세이다. 오늘, 내 마음에는 어떤 길이 새겨져 있는가? 만약 마음속에 ‘시온의 대로’가 분명히 그려져 있다면 복된 자이다. 외적인 조건이 복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삶의 방향 , 곧 하나님께 향한 길이 우리 존재의 본질을 정의하기 때문이다.

[한절 묵상] “너는 누구의 눈치를 보며 판단하고 있는가?” (시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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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의 눈치를 보며 판단하고 있는가?” 시편 82편 2절 |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하나님은 재판관들에게 준엄한 질문을 던지신다. 그들은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세워주신 자들이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불공정한 판결로 약한 자들을 짓밟고 있다. 힘 있는 자들의 얼굴을 살피며, 그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려주는 것이다. ‘불공평한 판단’은 정의를 무너뜨리고 사회의 근간을 흔든다. 특히 공적인 자리에서 권한을 위임받은 자가 불의를 행할 때, 그 영향은 더욱 크고 심각하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기준은 외모도, 지위도, 배경도 아니다. 오직 공의 다.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는 하나님의 책망은,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현실을 신랄하게 드러낸다. 지도자와 재판자, 그리고 각자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의로운 결정을 내려야 할 이들이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할 때, 공의는 땅에 떨어지고 만다. 하나님은 오늘도 동일하게 묻고 계신다. “너는 누구의 눈치를 보며 판단하고 있는가?” 믿음의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진실하게 행하는 자다. 우리 삶의 판단과 결정 속에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사람의 낯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 , 그가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다. **

[詩] 〈길어진 생명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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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어진 생명 앞에서〉 예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칠순, 천천히 문턱을 넘고 팔순, 긴 그림자를 따라 걷고 구순, 황혼 속으로 스며든다. 그러나 인생은 늘 이런 순서대로 되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너무 일찍 떠나가고, 누군가는 망백에도 꽃을 피운다. 장수는 복이라 했지만 걷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들을 수 없다면 남는 건 숨만 쉬는 고요한 방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쌓아 올린 재물보다, 이름 남긴 명예보다, 건강한 몸 하나가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 길어진 생명 앞에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 보다 어떻게 하루하루를 아름답게 살아낼지를.... ***

“머물면 미끄러집니다.” - 나아가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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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면 미끄러집니다.” 이 짧은 문장은 영적인 삶의 본질을 단번에 꿰뚫습니다. 신앙은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삶에서만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영적 정체의 위험성 영적 생활에서 현상유지란 곧 퇴보입니다. 마치 자전거와 같아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균형을 잃고 쓰러지게 됩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자리에 머물려는 순간, 보이지 않는 중력이 우리를 아래로 끌어당기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영적 감각은 점점 둔해지고, 하나님에 대한 열정은 식어가며, 세상의 유혹에 더 쉽게 노출됩니다. 어제의 은혜로는 오늘을 살 수 없고, 과거의 경험만으로는 지금의 갈증을 채울 수 없습니다. 전진하는 신앙 진정한 신앙은 전진하는 신앙입니다. 이는 단지 더 많은 예배나 지식 축적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날마다 깊어지고, 그분의 뜻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삶이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담아내는 방향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진은 도전을 받아들이고, 회개와 겸손으로 더 깊어지며, 이웃에 대한 사랑이 더욱 구체화되는 과정입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지식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이 말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기에 그분을 알아가는 여정에는 끝이 없습니다. 매일의 말씀 묵상과 기도, 삶의 자리에서 경험되는 순종을 통해 우리는 날마다 지식 너머의 인격적인 체험으로 자라납니다. 이러한 산 지식은 우리 존재를 변화시키고, 삶의 방향과 내용까지도 새롭게 만듭니다. 말씀 안에서의 한 걸음 모든 영적 성장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우리 발에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 됩니다. 작은 한 구절, 한 문장을 깊이 묵상하며 걷는 하루의 한 걸음이야말로 신앙의 여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진입니다. 작지만 꾸준한 발걸음들이 모여 우리의 인격을 빚고,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듬어갑니다. 영적인 삶은 매일의 선택 오늘 우리는 멈춰 설 것인가요? 아니면 주님을 더 깊...

[한절 묵상] “하나님 중심의 기도, 영광을 위한 간구” (시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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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중심의 기도, 영광을 위한 간구”   시편 79편 9절 |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이 기도는 “우리를 도우소서”라는 절박한 탄원과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라는 신앙의 고백이 하나로 어우러진 간절한 선언이다.  고난 속에서도 단지 개인의 문제 해결도 간구하지만,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우선시하는 참된 신앙의 태도를 보여준다.  진실한 믿음의 기도는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결코 자기중심적인 것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위한 간구 안에 ‘하나님’을 드러내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것이 성숙한 기도의 본질이다. 본문에 나오는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신실하심이 역사 가운데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백성을 위한 자비이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 그리고 언약의 신실함을 세상에 선포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중심적인 신앙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방향을 바꾸게 한다. 우리의 구원과 회복은 하나님의 영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으키실 때 비로소 세상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게 된다. 오늘 우리의 기도도 문제 해결만을 요청하기 보다는.  “하나님, 이 과정을 통해 주의 이름이 높임받으시고, 제 삶이 주의 영광을 비추는 도구가 되게 해 주세요”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 삶 전체의 주인이며, 모든 영광을 받으실 분으로 드러나게 된다. 고난 중의 기도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고통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하는 기도, 그것이야말로 성숙한 믿음의 사람에게서 나오는 기도이다.

신앙은 '접속'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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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은 '접속'의 문제입니다 시간이 쌓인다고 신앙이 저절로 깊어질까요? 오랜 기간 교회를 다녔다고 해서 믿음이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10년이 안 된 신앙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하고, 또 다른 사람은 수십 년을 교회에 몸담고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한다는 고백을 듣기도 해요. 그 차이는 어디서 비롯될까요? 바로 ' 접속 '입니다. 전원이 끊긴 냉장고처럼 아무리 멋지고 성능 좋은 냉장고라도 전기 플러그가 빠져 있다면? 그냥 철제 상자일 뿐입니다. 냉장 기능은 멈추고, 음식은 상하고, 얼음은 녹아내리죠. 컴퓨터도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고사양 기기를 갖췄어도 인터넷이 끊기면 유튜브도 뉴스도 접할 수 없어요. ' 연결 '이 생명을 유지하고 기능을 작동하게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긴 신앙은 아무리 오래되고 견고해 보여도 결국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이미 식어 있는 상태일 수 있거든요. 과연 우리 신앙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신앙은 '옛 추억'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동행'이었습니다. 솔직히 돌아봐야 할 질문입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진 않은가?      기도는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고 있나?      성경을 읽고 있지만, 삶에 변화가 있나?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심을 느끼고 있는가? 이 질문들에서 멈칫하게 된다면, 어쩌면 우리 믿음은 '접속 불량 상태'일지도 모르겠어요. 과거가 아닌 '지금'이 중요합니다. 20년 전의 은혜, 10년 전의 간증, 작년의 눈물 어린 기도... 그 모든 기억은 물론 소중해요. 하지만 오늘을 살게 하진 못합니다. 신앙은 지금 내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가 에 달려 있어요. 오늘 내 믿음의 전원은 꺼져 있지 않나요? 이 순간 내 영혼은 하늘과 연결되어 있나요?...

[한절 묵상] “마음과 손이 준비된 사람을 하나님은 쓰신다” (시7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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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과 손이 준비된 사람을  하나님은 쓰신다” 시편 78편 72절 |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윗에게서 발견된 두 가지 핵심 요소, '마음의 완전함'과 '손의 능숙함' 때문이다. '마음의 완전함'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과 변함없는 충성을 뜻한다.  다윗은 자신의 실패와 허물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엎드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손의 능숙함'은 단순한 기능적 숙련이 아니라 지혜로운 판단력과 실제 상황을 다스리는 탁월한 리더쉽을 가리킨다. 다윗은 목동으로서 양 떼를 돌보며 쌓은 경험과 실력을 토대로, 전장과 왕궁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지혜롭게 이끌어갔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중요한 사명을 맡기지 않으신다. 믿음은 기본 조건이고, 그 믿음 위에 인격과 능력을 함께 갖춰야 한다.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향해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위치에서 충실하게 자신을 단련해 온 사람을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신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을 지키며, 맡은 자리에서 성실히 준비하자.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으시고, 계획하신 뜻을 이뤄가신다. ***

[詩] 대나무 / 이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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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 이형산 굽힐 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부러지면 부러졌지 굽힐 줄 모른다고 말하지만, 생각의 끝에서는 무수히 휘어지고 흔들리고 있었다. 살면 살수록 잃어버리는 것이 더 좋을 때가 있었다. 흔들리고 휘어질 때마다 생긴 응어리를.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마디쳐 맺어진 시간은 차라리 잃어버리는 것이 좋았다. 살아보니 때로는 휘어져야 부러지지 않더라. 꽃에 목숨을 걸지 마라. 살아보니 꽃은 최후에 피는 것이고, 삶을 푸르게 했던 것은 꽃이 아니라 응어리질 때마다 피어나는 이파리더라.

[한절 묵상]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다” (시7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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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다” 시편 78편 42절 | 그들이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불순종이 원인이지만 하나님을 잊은 데서 비롯되었다. 출애굽의 놀라운 구원과 권능을 체험하고도 그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자 불신과 원망이 그들을 지배했다. 믿음의 핵심은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 이다. 출애굽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는 사건이다. 하나님을 잊으면 삶의 중심을 잃고, 두려움과 불안에 휘둘리게 되며, 결국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된다. 성경은 끊임없이 “기억하라”고 명령한다. 구원의 날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마음에 새기고, 날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망각은 신앙의 무너짐으로 이어지고, 기억은 믿음을 새롭게 한다.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곧 믿음의 시작이며, 성도의 삶은 그 구원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깊이 기억하고, 그분과 함께 걸어가자. 그것이 흔들림 없는 믿음의 길이다. ***

AI 시대가 일깨우는 하나님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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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시대가 일깨우는  하나님과의 대화 검색에서 대화로, 시대가 바뀌고 있다 생성형 AI의 등장은 우리가 정보를 얻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전에는 몇 개의 키워드를 검색창에 입력하고, 수많은 결과 중 필요한 정보를 선별해 스스로 조합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한 문장으로 질문하면, AI가 맥락을 이해하고 종합적이고도 맞춤형으로 응답해 줍니다. 이런 변화를 보며 문득 떠오른 질문이 있었습니다. "혹시 우리의 신앙생활, 특히 기도의 방식도 이런 변화를 겪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키워드 기도에서 대화 기도로 우리는 종종 기도를 '요청 목록을 나열하는 시간'으로 여기곤 합니다. "하나님, 건강 주세요.", "이번 일 잘 되게 해 주세요.", "복 내려 주세요." 이러한 기도는 마치 검색창에 키워드를 입력하듯 짧고 단편적인 요청을 드리는 방식과 닮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스스로 해석하거나 기다리기만 하죠. 하지만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요청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라 인격적인 대화의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때, 그분은 훨씬 더 깊고 개인적인 응답으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축복해 주세요"라는 말 대신 "하나님, 요즘 제 삶이 고단합니다. 어디서부터 회복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진짜 ³복인지 알게 해 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건강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는 "하나님, 요즘 자꾸 몸이 약해지면서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 불안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라는 솔직한 고백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는 단순한 요청의 나열에서, 하나님과 함께 의미를 나누고 마음을 여는 대화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깊고 풍성하게 자라나기 시작합...

나에게 솔직하게 진짜 나로 살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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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솔직하게 진짜 나로 살아가는 것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나 자신인데, 왜 그 마음을 가장 외면했던 걸까." 🤔 가장 후회되는 순간들 가장 후회되는 순간을 떠올려 보면, 실패나 실수보다 ‘내 마음을 외면했던 순간들’이 먼저 떠오른다. 누군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분위기에 맞춰야 할 것 같아서, 또는 괜히 나서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렇게 수없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던 순간에도 ‘괜찮아’라며 웃었던 기억들. 타인의 기대에 맞춘 선택들이 쌓이면서, 어느새 나는 내가 누구였는지도 흐려졌다는 걸 그땐 몰랐다. 그러다 문득 거울 속 낯선 내 얼굴 앞에서 묻게 된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던 삶일까?” 😔 말뿐만이 아니었던 거짓말들 솔직하지 못했던 건 말뿐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너무 늦었어”, “현실적이지 않아”라는 말로 스스로를 가뒀고, 마음이 기뻐하지 않는 관계를 억지로 이어가며 “이 정도면 됐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내 진짜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친구들 앞에서도,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꾹 눌러두고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했다. 회의 중 떠오른 아이디어도 “괜히 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안전한 길만 걸으려다 보니 어느새 내가 가는 길조차 잃어버리고 있었다. 💡 결국 깨달은 것 결국 깨달았다. 나를 가장 잘 안다고 믿었던 내가 정작 내 마음의 소리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것을. 겉보기에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려 애쓰느라 정작 나 자신에게는 가장 소홀했다는 것. 하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후회는 ‘진심을 외면한 자리’에서 자라고, 용기는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솔직해지겠다’는 다짐에서 시작된다는 걸. 🌱 작은 변화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속이고 싶지 않다. 좋아하는 건 좋아한다고, 싫은 건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쉽지...

[詩] 사랑은 꽃이고, 정은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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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꽃이고, 정은 나무다 사랑은 눈빛 하나에 피어난다 설렘은 불꽃이 되고 그 순간은 눈부시다 하지만 불꽃은 식고 꽃은 진다 그 뒤에 남는 것, 정 이다 정은 비를 함께 맞던 기억 말 없이 건넨 손길 돌아서도 잊히지 않는 마음 사랑은 달콤하지만 금세 사라지고 정은 은근하지만 오래 남는다 사랑은 처음을 열고 정은 끝까지 남는다 사랑은 이름을 불러주고 정은 '우리'를 남긴다 지금 곁에 있는 그 사람, 사랑을 지나 정으로 뿌리내린 우리일지도 모른다 ***

[한절 묵상] "말씀 위에 세워진 삶만이 흔들림 없다" (시7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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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위에 세워진 삶만이 흔들림 없다 ” 시편 78편 1, 7절 |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율법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을 사랑하시며 인도하신 증거이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생명의 길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잊을 때마다 무너졌고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할 때마다 회복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않고 그 계명을 지키며 살아야 하며, 더 나아가 이 진리를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 한다. 변화무쌍한 세상 가운데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삶의 길이다. 또한 말씀을 따라 사는 본을 보임으로써 다음 세대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이끌어야 한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개인의 믿음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다음 세대에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일이다. 오늘도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며, 자녀와 후대에게 그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말씀 위에 세워진 삶만이 흔들림 없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쓸모 있는 시니어의 삶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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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모 있는 시니어의 삶이란 무엇인가 존재의 이유를 되찾는  시니어의   삶 “나이 들어도, 누군가에게 여전히 필요한 사람이고 싶다.” 젊을 땐 누구나 말합니다. “돈이 전부는 아니야.”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깨닫게 됩니다. 돈이 없으면 건강도, 관계도, 심지어 자존감까지 무너진다는 사실을. 그러 나 더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돈이나 건강보다 더 깊은 차원의 결핍,  그것은 바로 ‘쓸모’입니다. 시니어 의 외로움은 단지 사람이 곁에 없어서가 아니라, ‘나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라는 자각에서 시작됩니다. ‘쓸모’는  시니어 의 자존감이다 나이 들면 누군가에게 기대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 때, 사람은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아버지의 조언이 큰 힘이 됐어요." "어머님 덕분에 마음이 놓였어요." 그 말 한마디가  시니어 의 마음에 꽃을 피웁니다. 쓸모 있는  시니어는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능력’보다 ‘누군가의 삶에 여전히 의미 있는 존재’로 남는 일 에 가깝습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필요한 존재감' 의외로 많은 사람이 노후의 불안 이유를 '돈'으로 말합니다. 물론 돈이 필요합니다. 돈이 있어야 병원도 가고, 최소한의 선택권도 생기니까요. 그러나 돈은 중요하나 ‘수단’일 뿐입니다. 돈이 많아도 아무도 내 전화를 기다리지 않고 내 이름을 부르는 이가 없다면 그 부는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도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인가?”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을 때 노년은 덜 초라해집니다. ‘쓸모’는 사회적 역할로 확장된다 ‘쓸모’는 가족 안에서만 머물지 않습니다. 지역 사회, 후배 세대, 취미 모임 안에서도 우리는 필요한 존재 가 될 수 있습니다. 어린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어주는 일 동네 마을회관에서 자원봉사로 상담하는 ...

[한절 묵상] “기억은 믿음을 다시 일으키는 영적 호흡이다” (시7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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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믿음을 다시 일으키는 영적 호흡이다”   시편 77편 11절 |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시편 기자는 혼란과 절망 가운데서도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며 자신의 시선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린다. 여기서 ‘기억한다’는 말은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반복적으로 되새기는 믿음의 행위이다. 신앙은 기억에서 힘을 얻는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는 사람은 현재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할 수 있다. 기억은 믿음을 다시 세우는 기초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붙드는 영적 호흡이다. 하나님은 어제도 일하셨고, 오늘도 일하시며, 내일도 여전히 신실하게 일하실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기억하고 묵상해야 한다. 과거의 기적은 과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믿음을 세우고 내일의 기대를 만드는 힘이 된다. 오늘도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역사는 기억하는 자에게 이뤄진다. ***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 없이 살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과 은혜, 인도하심을 삶의 이유와 방향으로 삼는 것이며, 말씀을 날마다 되새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어떤 순간에도 “주께서 나와 함께 계셨다”는 고백을 잊지 않는 삶이다.

“부르짖는 기도, 그 자체가 믿음의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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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짖는 기도, 그 자체가 믿음의 응답이다” 시편 77편 1절 |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시편 기자는 자신의 고통과 절망을 가만히 삼키고만 있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음성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다. 이는 단순한 탄식이 아니라 귀 기울이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 찬 신앙 고백이다. 하나님은 밤낮으로 부르짖는 성도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시편 기자는 위기의 밤에도 손을 거두지 않고 눈물로 기도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해결자이심을 믿었다. 이 믿음은 상황이 변하기 않아도 기도로 반응하게 하며, 끝내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확신하게 만든다. 기도는 단지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표현이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이다. 당장 응답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의 귀에 이미 닿아 있고, 그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한 줄기 빛과 평안을 경험하게 된다. 부르짖는 기도는 곧 응답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자를 반드시 만나 주시며, 때가 되면 구원과 회복의 손길로 응답하신다. 오늘도 낙심하지 말고, 주 앞에 당신의 음성으로 부르짖어 기도하라. 그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는다. ***

말 한마디의 온도 - 조금 더 따뜻하게, 조금 더 다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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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한마디의 온도 어제  오랜만에 만난 지인의 말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요즘 표정이 많이 밝아졌네요"라는 그 한마디가. 허공에 새겨지는 마법 말이란 참 묘한 존재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을 흔들고, 손에 잡히지 않지만 관계를 흔든다. 글은 종이 위에 남지만, 말은 공기 중에 흩어진다. 그런데 그 흩어지는 말이 때로는 글보다 더 깊이, 더 오래 남는다.  한번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되돌릴 수가 없다. 지우개로 지울 수도, 가위로 잘라낼 수도 없다. 그저 공기를 타고 퍼져나가 누군가의 마음 속에 스며들 뿐이다. 입 다스리기의 철학 뜻 글자인 한자를 배울 때 신기했던 게 있다. 군자(君子)의 '군(君)' 자를 보면, '다스릴 윤(尹)' 밑에 '입 구(口)'가 들어있다. 입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진짜 리더라는 뜻이다.  그리고 '품격'의 '품(品)' 자는 입이 세 개나 모여 있다. 결국 사람의 말이 그 사람의 격을 보여준다는 거다. 말이 곧 사람이구나. 유리컵 같은 관계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유리컵 같다.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데, 한 번 깨지면 원래대로 돌아가기 어렵다. 수십 년 쌓아온 우정도 말 한마디로 금이 갈 수 있고, 오랫동안 서먹했던 사이도 따뜻한 말 한마디로 다시 가까워질 수 있다.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말했다. "그때 네가 해준 말 덕분에 많이 위로받았어."   나는 그때 뭘 말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에게는 아직도 남아있는 말이었다. 오늘의 말 처방전 "괜찮아" - 불안해 하는 사람에게 "고마워" -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에 "잘했어" - 작은 성취에도 "있어서 다행이야" - 곁에 있는 사람에게 거창한 건 아니다. 그저 조금 더 따뜻하게, 조금 더 다정하게. 마음에 새기는 것 말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

[한절 묵상] “하나님의 심판은 온유한 자의 구원이다” (시 7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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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은 온유한 자의 구원이다”   시편 76편 8~9절 |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셀라)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실 때 땅은 두려움 가운데 잠잠해진다. 그 침묵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 권세가 무력해짐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의 회복이며 억눌리고 짓밟힌 온유한 자를 위한 구원의 시작이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한 자란 상황에 휘둘리는 나약한 자가 아니다. 고난과 억압 속에서도 자기 힘을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와 뜻을 신뢰하며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연약해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강한 믿음의 사람이다. 이러한 온유한 자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일어나신다. 세상의 권세는 교만과 폭력으로 다스리지만, 하나님은 경외하는 자를 기억하시고 그들을 위해 친히 싸우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두렵고 무거운 일이지만, 동시에 억울한 자에게는 회복과 구원의 소망이다. 믿음으로 온유함을 지킨 자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눈으로 보게 된다. 오늘도 정의가 지연되고,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결코 잠잠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심판하시며, 그 심판은 온유한 자를 위한 구원으로 완성될 것이다. 하나님은 경외하는 자, 믿음의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

[한절 묵상] “감사는 믿음의 사람이 드리는 신앙의 고백이다” (시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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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는 믿음의 사람이 드리는 신앙의 고백이다” 시편 75편 1절 |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주의 이름이 가까움으로 감사한다는 시편 기자의 이 고백은 평온한 시기의 감사가 아니다. 강력한 대적의 위협과 혼란 속에서도 그는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의 이름, 곧 하나님의 존재와 도우심이 가깝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은 위기에 절망하지 않는다.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신뢰하며, 하나님께서 그 위기를 통해 일하심을 바라본다.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 곧 놀라운 역사하심이 드러날 것을 확신하기에 감사하는 것이다. 절망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드리는 감사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고백이자 영적 전쟁터에서 외치는 승리의 선언이다.  감사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감사는 누구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귀중한 신앙의 열매이다. 오늘도 감사할 이유를 찾기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와 가까이 계심을 기억하자. 그리고 믿음으로 감사하자. 그 감사가 곧 하나님의 능력을 초청하는 통로가 될 것이다. ***

[詩]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 나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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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나태주 너,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 조금쯤 모자라거나 비뚤어진 구석이 있다면 내일 다시 하거나 내일 다시 고쳐서 하면 된다 조그마한 성공도 성공이다 그만큼에서 그치거나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고 작은 성공을 슬퍼하거나 그것을 빌미 삼아 스스로를 나무라거나 힘들게 하지 말자는 말이다 나는 오늘도 많은 일들과 만났고 견딜 수 없는 일들까지 견뎠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오히려 칭찬해주고 보듬어 껴안아줄 일이다 오늘을 믿고 기대한 것처럼 내일을 또 믿고 기대해라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일로ㄴ 너, 너무도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 나태주 제49시집,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열림원, 2022)

[한절 묵상] “끊을 수 없는 언약, 기억을 향한 탄원” (시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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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을 수 없는 언약, 기억을 향한 탄원” 시편 74편 2절 | 옛적부터 얻으시고 속량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께서 계시던 시온 산도 생각하소서 바벨론에 의해 시온산이 무너지고 성소가 파괴된 절망의 상황 속에서 시편 기자는 탄식하고 있지만 않고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한다. 그는 “기억하시며…생각하소서”라고 반복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백성, 곧 주의 기업으로 삼으신 회중을 돌아보아 달라고 강청한다. 이 표현은 과거의 구속과 인도하심을 기억하고, 지금도 동일한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간절한 요청이다. 기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을 근거로 삼는다. 단순한 감정적 호소가 아니라, “속량하신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성도는 어떤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지 않고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으셨고, 그 관계는 누구도 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때에도 하나님께 더 나아가야 한다. 외적인 모든 것이 무너졌을지라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해 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이 잊으셨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고 여전히 기대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표현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기억과 언약에 의지하여 다시 회복과 구원을 간구하자.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 ***

[한절 묵상] “하나님 앞에서 비로소 눈이 열리다” (시7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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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비로소 눈이 열리다” 시편 73편 17절 |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편 기자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말씀과 기도가 살아 있는 곳이다. 바로 그곳에서 시편 기자는 악인의 화려한 현재 너머에 있는 심판과 멸망의 종말을 깨닫게 된다. 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지 장소적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영적 행위를 말한다. 하나님을 찾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흔들리던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안정되고, 땅의 왜곡된 시각이 하늘의 관점으로 교정된다.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는 삶, 곧 말씀 앞에 머물고,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회복할 때, 비로소 세상의 형통과 고난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곧 복의 시작이다. 하늘의 소망을 가진 자는 땅의 절망을 이겨낸다. 오늘도  하나님 앞으 로 가까이 나아가자. 그곳에서 비로소 우리는 내 눈에 보이는 현실로 인한 모든 혼란으로부터 길을 찾고,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

통과협 워크숍 마치고 부산에서 상경하는 기차에서

통과협 워크숍 마치고 부산에서 상경하는 기차에서 통일 과학기술 연구 모임을 위해 오래간만에 부산을 찾았다. 7시간 남짓한 짧은 체류 일정이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오래 남을 시간이 될 것이다. (이틀간 일정이지만 사정상 먼저 귀경함.) 부산은 나에게 특별한 도시다. 세상 모르던 청소년기를 이곳에서 보냈기에 부산에 갈 때면 남다른 감정으로 다가온다. 오늘도 부산역에서 범내골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오래전 기억 속 동네 풍경들을 스치듯 바라보았다. 차량조차 들어갈 수 없던 그 좁은 골목의 셋집은 이제 흔적조차 없겠지만. 범내골 근처를 흐르는 동천은 여전히 탁한 물빛으로 햇살을 반사하며 조용히 흘러간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감조하천이라 수질 개선이 쉽지 않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여야 하나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조금은 낯선 이름의 아바니호텔 세미나 공간에 서울, 일산, 대전 그리고 제주에서 연구자들이 모였다. 그간의 남북 과학기술 연구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며, 우리가 함께 걸어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차분히 점검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우리 모두는 쉽지 않은 시간을 버텨왔다. 통일 과학기술 연구는 미래 통일 한국을 준비하는 일이지만, 주목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부로부터 폄훼 당하기까지 했다. 화려한 성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아니고, 드라마틱한 서사로 포장될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길을 멈출 수 없다. 우리의 미래 세대가 살아갈 이 땅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달동네 같은 곳에서 살던 시절처럼 힘든 날은 계속 된다. 아직도 정화되지 못한 동천처럼 지금 세상도 여전히 혼탁하고 흐리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가고 그려가는 통일의 미래는 이대로 머물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연구하며 준비한 만큼의 새로운 세상은 반드시 열릴 것이다. 그래서 당장의 가시적 성과가 없더라도, 같은 마음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선후배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 우리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힘이 되고, 다시 걸어나갈 ...

📖 기대고 산다는 것

기대고 산다는 것 – 연약함이 들려주는 진짜 이야기 “기대고 산다”는 말은 종종 스스로 약하다는 고백처럼 들리곤 합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말이 아닐까요? 우리는 누구나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힘들 땐 하늘을 올려다보며 위로를 찾고, 지칠 때는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마음을 기대며 숨을 돌립니다. 기쁠 때도 그 기쁨을 나눌 사람이 있어야 더 따뜻해집니다. 우리는 자연에도, 사람에게도, 하루하루의 작은 일상에 기대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다 받아주진 않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외면을 당하고, 오래 다닌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건강을 자신했던 몸이 병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상처받은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이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을 것이다. 나 혼자 살겠다.” 마음의 문을 닫고, 자신을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대는 잘못이 아닙니다. 문제는 누구에게, 무엇에 기대는가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의 품에 안겨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기대는 인간됨의 증표이고, 우리가 서로를 잇는 다리이기도 합니다. 기대는 관계를 만들고, 관계는 우리를 위로하고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는 없습니다. 겉보기엔 강한 사람도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누군가를, 무언가를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어떤 기대를 선택할 것인가?” 변할 수 있는 것에 기대느냐, 변하지 않는 것에 기대느냐. 사람도, 상황도 변합니다. 그래서 상처받기도 하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기대 자체를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고, 흔들리지 않는 기대처를 찾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질문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기대는 삶이 얼마나 든든한지 압니다. 그 기대는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약...

[한절 묵상]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들라” (시7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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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들라”  시편 73편 1~2절 |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라는 고백은 시편 기자의 신앙 고백이자 믿음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 고백 바로 다음에는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라고 고백한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받는 이러한 모순의 상황 속에서 그의 믿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머리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 있지만, 현실 앞에서는 여전히 흔들리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믿음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시험하신다. 그럴 때 악인의 번영은 부당하게 느껴지고, 하나님의 공의는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 또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며, 그분의 통치에서 벗어난 것은 없다. 진정한 신앙의 견고함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을 신뢰하는 데서 나온다. 시편 기자는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끝내 붙들었고, 결국 그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공의와 끝없는 선하심을 찬양하게 되었다. 오늘도 우리가 처한 현실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마음의 정결함을 지키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붙들자. 때가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뜻을 밝히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선하심을 찬양하게 하실 것이다. 흔들릴 때일수록 하나님의 변치 않는 성품을 붙드는 것이 참된 믿음의 길이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도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더욱 견고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져 갈 것이다.

[명언 해설] 천천히 서둘러라 – Festina le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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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천히 서둘러라 – Festina lente 속도와 신중함은 양립할 수 없는 덕목일까? 고대 로마에서 유래한 이 짧은 라틴어 격언은 그 물음에 담백한 해답을 준다.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 , 직역하면 “ 서둘러라, 그러나 천천히 ”라는 뜻이다. 겉보기에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삶의 지혜가 압축된 절묘한 균형의 말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좌우명 이 표현은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가 자신의 정치 철학으로 삼은 좌우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국가의 중대한 사안들을 결정할 때 항상 이 말을 되새겼다고 한다. “신속한 실행”이 필요하지만, 그 속에는 반드시 “깊은 숙고”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이를 상징하기 위해 민첩한 돌고래와 묵직한 닻 을 함께 새긴 문장을 사용했다. 빠름과 느림이 함께 그려진 이 상징은 “페스티나 렌테”의 정신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현대인의 삶에 주는 교훈 오늘날 우리는 빠름의 시대에 살고 있다. “빨리빨리”가 일상이 된 한국 사회, 실시간으로 반응해야 하는 디지털 환경, 몇 초 안에 결과를 원하는 소비 문화 속에서 ‘천천히’는 자칫 낙오의 기호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바로 이 시점에서 “천천히 서둘러라”는 말은 더 깊은 울림을 준다. 과속은 피로를 부르고, 조급함은 실수를 부른다. 무작정 느리게 가라는 것이 아니다. 속도를 내되 그 속에 방향과 안전, 성찰이 담겨야 한다는 것이다. 삶과 일, 관계에 필요한 태도 일 에서의 페스티나 렌테   : 기한은 지키되, 과정을 소홀히 하지 말라. 관계 에서의 페스티나 렌테   : 말은 아끼되, 진심은 먼저 전하라. 삶 에서의 페스티나 렌테  : 서두르되, 자신을 놓치지 말라.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는  삶의 자세 끊임없이 재촉당하는 현실에서,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중심을 되돌아보게 한다. 속도와 신중함은 적이 아니라 동반자다. 천천히 가더라도 뚜벅뚜벅 정확히...

[한절 묵상] “대제사장의 죽음, 죄인을 자유케 하시는 예표” (민3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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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의 죽음, 죄인을 자유케 하시는 예표” 민수기 35장 28절 |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머물러야 할 것임이라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 소유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도피성에 피한 자는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이는 고의가 아닌 과실로 인해 사람을 죽였더라도 죄에 대한 책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 살인자는 보복의 위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본래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대제사장의 죽음을 살인자의 죽음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하는 강력한 예표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해 반드시 대가를 요구하신다. 우리 죄는 고의든 실수든 형벌을 치러야 한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자비의 길도 예비하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대가가 지불된 것이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대제사장이시며, 동시에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대속물이다. 그 죽음은 모든 믿는 자들의 죽음으로 간주되며, 그 희생 으로 우리는 자유함을 얻는다. 더 이상 죄의 정죄 아래 머무르지 않고, 생명과 자유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무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성취되었고, 그로 인해 우리는 용서와 새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 도피성에서 해방된 자처럼,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은 존재이다. 오늘도 그 십자가 앞에서 감사하며, 이 은혜를 더욱 깊이 누리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구원(해방)은 값 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보배로운 피값을 치루고 이뤄진 거룩한 공의의 결과이다. ***

[리포트] 군(郡) 수준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있는 전국의 ‘시(市)’ 10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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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郡) 수준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있는 ‘시(市)’ 10곳 순위 시 명칭 위치 인구(2025.4) 주요 특징 및 문제점 1위 태백 강원 37,642명 해발 800m 고지대, 석탄산업 쇠퇴 후 대체산업 부재, 전국 최소인구시 2위 계룡 충남 46,109명 군 행정 중심 계획도시, 민간 인프라 부족, 대전 의존도 높음 3위 삼척 강원 61,485명 해양 도시, 탄광·항만 기반 산업 쇠퇴, 내륙 접근성 낮아 인구 급감 4위 문경 경북 66,501명 석탄 산업 후 관광 개발 시도, 고령화 심각, 면 지역 기능 약화 5위 동두천 경기 86,695명 미군 철수 후 산업 공백, 수도권 내 낙후지역, 인구 유입 거의 없음 6위 상주 경북 91,227명 교통 요충지였으나 산업 기반 약화, 청년 유출 지속 7위 논산 충남 107,750명 육군훈련소 소재, 민간 자족기능 약함, 읍·면 고령화 심각 8위 나주 전남 117,188명 혁신도시 유치에도 인구 증가 효과 미미, 청년 유출 규모 큼 9위 제천 충북 128,708명 한방 산업 중심, 수도권 연계성 약해 인접 도시 경쟁력에 밀림 10위 포천 경기 141,186명 수도권 북부 낙후지역, 유동인구 적고 신도시 개발 제외